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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전자사전
' 갑오개혁'에 대한 '용어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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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갑오개혁 행정사
내용

 갑오개혁

 

의의 : 갑오개혁은 초기에 온건개화파가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던 것을 의미 하며, 이후 개화파 내각의 주도하에 을미개혁과 을미사변 및 아관파천까지를 포함하는 2년간(1984-5) 국정 전반에 단행된 대개혁을 말한다. 주로 초기에는 일제의 소극적 간섭으로 군국기무처의 자율적 개혁이 전개되었으나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이 강화되면서 친일파를 매개로 종속적인 개혁으로 전락하였다. 갑오정권은 일본군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으로 성립되었으며 일본군의 부당한 간섭 및 결탁과 수구세력의 집요한 저항이라는 큰 장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자주 개혁을 견지하려 하였다. 이들은 이미 '군민공치(君民共治)'의 근대국가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고 사회 경제 차원에서 근대국가의 개혁안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갑오개혁이 자주적이든 타율적이든 간에 이는 조선왕조국가의 봉건체제에서 근대국가 체제로 이행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개편된 근대적 관료제도는 이후에 대체로 유지되었고, 재정 및 토지·세제의 개혁과 교통·통신시설의 정비로 조선의 경제구조가 혁신되었다.    

 

배경: 강화도 조약으로 정권유지를 위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붕괴되자 조정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되었다. 개국정책을 채택한 민비는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를 창설하였다. 구식군대는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로 군료(軍料)미지급의 빈번함과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민씨측근세력의 살해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는 군사쿠데타(임오군란, 1882)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비의 요청으로 개입한 청(淸)국군이 대원군을 납치 및 유폐시켰다. 민비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자 1884년 지식인의 쿠데타(갑신정변)가 발발하였고, 민비의 개화파는 이제 수구세력으로 밀려났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개화독립당의 소장 정치가들이 집권하였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였다. 민비가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자 청은 대원군을 석방하였으나 민비파는 대원군파를 일대숙청하고, 임오군란 주동자의 참혹한 처벌과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한 김옥균을 추적하여 살해하였다.
  지배층간의 대립과 피지배층의 탄압이 10년간 극한적으로 지속되었다. 민비의 세도정치로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자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지배층에 대한 저항과 도전에 이르게 되었다. 지배자의 학정과 부패로 전국 200여 곳에서 민란이 지속되면서 이들이 1984년 동학교도혁명으로 점화되었다. 이들은 정치개혁 요강의 발표를 통하여 절대왕정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 - 평등의 정치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동학혁명은 정부의 힘으로 진압할 수 없었고 청·일 양국의 군대로 좌절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운현궁에 은거하면서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던 차에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유길준, 김가진 등의 온건개화파를 신정권의 수립과 정치참여를 허용하였다. 1984년 민비정권이 붕괴되자 조정은 동상이몽의 3집단이 합작하는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온건개화파는 일본군과 대원군의 세력을 활용하여 민비정권을 붕괴시키고 청국의 간섭으로 벗어나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코자 한 반면에 일본군은 온건개화파를 친일세력으로 포섭하면서 대원군을 앞장세워 신정권을 조종하려고 하였다. 대원군은 온건개화파와 일본군의 협조하에 정권을 장악한 후에 독자적 국정을 집행코자 하였다.

 

개혁의 과정과 내용 :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기습 점령하여 민비정권을 붕괴시키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과도정부는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자주적 대개혁을 추진하려하였으나, 집권의 극심한 정당성 약화와 계속되는 수구적 대원군의 반개화 압력 및 일본군의 부당한 간섭으로 한계를 수반하였다. 결국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강행된 내정개혁이었으나 그 내용은 동학혁명에서 요구한 것이 상당부분실현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초기에 행정부(의정부)와 별도의 입법기관으로 개혁입법과 개혁추진의 주체기관으로 설립된 군국기무처는 3개월 정도 존속한 비상입법기관이었으나 약 210건의 개혁의안을 의결·공포하였다.
  갑오개혁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국가기구의 개혁으로 종래에 궁중이 국가사무에 무제한적으로 간여하던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내각제도를 수립하여 내각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근대국가체제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6조체제를 수정하여 행정부 최고기관인 의정부의 총리대신 아래에 8아문을 두었다. 근대경찰기관으로 경무청이 내무아문에 신설되었으나 경무청의 장관인 경무사는 각 아문의 장관인 대신들보다 강한 실권을 갖고 있었다. 둘째, 민족자주성의 강화를 위해서 태조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해를 개국원년(1392년)으로 연도표기를 하도록 법제화하였다. 셋째, 사회신분제도의 폐지를 법제화하였다. 양반·상민의 신분차별제의 폐지, 문벌제도의 폐지, 능력본위의 인재채용제도의 기초 마련, 문·무관의 차별폐지, 연좌제도 폐지, 공사노비제도의 폐지, 과부의 재가금지제도 폐지, 조혼제도의 폐지, 평민의 정치적 의견제출 승인 등. 넷째, 근대관료제도의 수립과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기존의 구품정종제(九品正從制)에서 1, 2품의 정종(正·從)은 두고, 3품이하는 정종을 폐지하고 11등급으로 간소화하여 1, 2품을 칙임관(勅任官), 3품부터 6품을 주임관(奏任官), 7품부터 9품을 판임관(判任官)으로 3등급제화 하였다. 과녹제(科祿制)에서 월봉제(月俸制)로 개혁한 봉급의 경우 상후하박(上厚下薄)이 심하였으며 화폐로 지급하도록 하였다. 관료의 채용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각 지방에서 인구비례로 추천을 받아 전고국에서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을 실시하였다. 다섯째, 재정․경제 제도의 개혁과 금납제를 실시하였다. 기존에는 왕실과 각 정부기관이 독립회계․수세제를 실시하였으나 모든 재정은 탁지아문에서만 통일적으로 총괄하여 관장하도록 개혁하였다. 모든 잡세는 폐지하였다. 흉년에 대비한 구황책으로 기존의 환곡제도를 폐지하고 사창(社倉)을 설립하였다. 또한 홍삼에 대해서 정부의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여섯째, 화폐제도의 개혁과 도량형제도를 통일하였다. 길이의 표준으로 장척(丈尺)과 부피의 표준으로 두곡(斗斛)과 무게의 표준으로 칭형(秤衡)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관제 도량형기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곱째, 지방제도 개혁으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를 재편성하였다. 지방자치를 강구하는 향회를 시행토록 하여 근대국가의 필수적인 지방민의 여론수렴과 국정참여를 가능케 하였다.        
          
  결과 및 시사점 : 고종의 아관파천 감행으로 붕괴된 갑오정권은 일본이 조선을 정치·경제적으로 침략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들은 정권수립의 정당성확보와 근대개혁의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일본과의 유착으로 개혁의 치명적인 한계에 봉착하였다. 또한 갑오개혁은 근대국가의 제도화를 통해 제도적 개혁을 실현하였으나 지배층의 주도권 투쟁이 지속되었고, 군주권과 민중의 여론을 배제한 개혁관료들의 정책결정과 집행으로 지지기반이 취약하였다.   
 
 참고문헌
김운태(2001), 조선왕조 정치·행정사(근대편), 박영사.
국사편찬위원회(2000), 한국사.
신용하(2001),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왕현종(2003),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한국정치외교사학회편(1994),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쟁점, 집문당.
한국정치외교사학회편(1995), 한국 근대정치사의 쟁점, 집문당.

 

키워드: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 온건개화파, 군국기무처, 동학혁명

 

저자: 김 종 미(bellkim@hanafos.com)
작성일: 2008년 7월 20일